그 어떤 가정에서도 국민이라면 누구나
일요일의 냄비에는 닭고기가 들어있기를.
일요일에는 닭고기의 포트 후[pot-au-feu]를 제안함으로써
그 어떤 가난한 국민일지라도
더 없이 브르조아적인 요리의 맛을
맛보여주고 싶다고 .
그것이 선왕 안리4세의 바램이였다.
그만큼 포트 후[pot-au-feu]는
그 먼 옛날서부터 존재했던 요리이다.
그 옛날
동굴속에서 살고있던 사람들이
물을 끓일수있는 용기를 만드는 기술을
습득한 순간 태어났다.
인류 최초의 조리법은
구이[brochette grillée] 였다.
그다음 부용[Bouillon]에 이어서
소스[Source]가 등장했다.
그리고 중세에 이르러서는
사람들은 누구나
일단은 고기를 삶은다음
구워서 소스를 곁들인다거나
하는등의 조리를 한다
따라서 표트 후는
농촌에서건 도시에서건
먼 옛날 부터 전해 내려온
전통적인 요리이며
소고기든 돼지고기든 닭고기든 상관 없이
그때그때 형편에따라서
냄비에 집어 넣고 끓였다
때로는 적은 양의 고기기름와 야채뿐인 경우도 있었다.
어진 임금님이 국민을 위하는 일염으로 제안했던
포트 후[pot-au-feu].
그 심플하기 짝이없는 조리법 때문이였을까.
프랑스왕국의 각 지역에는
그 지역마다의
독자적인 레시피가 수백이라는 단위로
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그 위력을 알수있다.
뼈와 고기를 야채오 함께
물을 넣고 끓여내는
포트 후라는 요리에서
그 뼈와 고기,그리고 야채의 맛이 듬뿍 담긴
국물이 나중에 독립해서 탄생한것이
바로 오늘날의
부용[Bouillon]인 것이다.
하지만 그러기까지는
긴세월 동안 포트 후는 이중생활을 해야만 했다.
서민들한테의 포트 후는
냄비안에든 고기 그자체를 의미했고,
동시에 보타쥬[Botaju]로 변신하게될
부이이[Buii],고기,야채의 대명사였고
먹고남은 포트 후도
그냥 포트 후라고 부르기도 했다.
한편,
부르조아적인 식사와 요리인,
상류사회의 야식의 세계에서의 포트 후의 존재는
그냥 부용[Bouillon]을 만들기위한 베이스에 불과했다
하지만 머지않아 이 포트 후를 맑게 해서
콩소메[consommé]가 만들어진다는것을 생각하면
포트 후가 없었으면 젤 미니[gel Minnie]도
존재하지 않았고
또, 젤 미니[gel Minnie]가
위대한 보타쥬[Botaju]로 새로 태어날수 있었던것도
결국에는 포트 후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건
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.
부이이[Buii]라는 말에 경멸적인 뉘앙스가
붙어다니는것도
이런 경위에서일지도 모른다.
부이이[Buii]는 어디까지나
서민적인 음식이었다.
부용[Bouillon]이나 콩소메[consommé]를 대량으로
사용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는
남은 부이이[Buii]를
직원들에게 식사로 먹일때도 종종 있었다.
매일 부이이[Buii]가 식사로 나온다는
그 이유만으로
직원들이 파업선언을 하는 사건이 생긴일도 있을 정도 였음.
오스마즘 이론[théorie Osumazomu]으로 유명한
브리아 = 사봐란[Bria = Savarin]은
냉수와 열탕,
서로 각자의 상태에서밗에 유출되지않는
각각의 우수한 맛이 있다는 사실을
발견했다.
고기의 표면을 카라멜 화시켜서 만든 루의 형성으로
만들어지는
맛있는 보타쥬[Botaju]야 말로
오스마즘 이론[théorie Osumazomu]이라고
그는 말했다.
쉽게 말하자면
맛있는 부용[Bouillon] 만들고 싶으면
고기를 처음부터 냉수에 넣어서 끓여야 하고
반대로
맛있는 고기를 먹고자한다면
열탕에 고기를 넣어라...
라고.
프랑스요리에 관심이 있어
한번은 프랑스 요리책에서
부용[Bouillon]이나 콩소메[consommé]의 레시피를
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알것이다.
한국육수나 일본다시처럼